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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교회사] 진주배돈병원 [晋州培敦病院 the Paton Memorial Hospital]

crossmap 2013-08-04 (일) 05:51 3년전 4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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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1908년 경남 진주에 설립된 기독교 병원.


오스트레일리아장로회 의료선교 사커렐이 05년부터 선교 및 의료 활동을 시작하여 페이튼부인의 기금지원을 기념하기 위해 08년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커렐 후임으로 여선교사 켈리(M. Kelley), 스콜(Scholes) 등이 맡아보았고 한국인 의사도 함께 의료사업에 힘썼다. 특히 배돈병원은 진료와 함께 복음전도에도 힘써 많은 결신자를 얻었으나 42년 경 모든 활동이 중단되었다. 

'배돈병원(培敦病院)'은 비록 진주지역에 대한 기독교의 전도사업을 위한 한 방편으로 세워졌으나, 근대 의료기관으로서 역할했던 바는 상당히 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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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도 배돈병원의 외래진료환자가 연간 1만7천6백20명이나 되는데, 그중 시료환자는 5천8백80명이고, 입원환자는 1만3천7백53명이나 됐다. 이는 당시 행정구역이었던 진주부의 인구가 일본인까지 포함해 모두 4만7천2백여명이었음을 볼 때 배돈병원에 치료를 위해 출입했던 사람들의 수치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물론 배돈병원에 반드시 진주부민들만 출입했던 것은 아니다. 서부경남은 물론 중부경남과 멀리는 전라도 광양 등지에서도 왔었음을 볼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배돈병원을 찾았는지 알 수 있다. 


1913년 11월4일 호주선교회는 선교회가 세운 옥봉리 교회 옆에다 근대식 병원을 건립(지금의 봉래동 위치)하고 봉헌식을 거행했다. 이 병원이 바로 배돈병원이며, 호주장로교 총회가 선교구역 시찰자로 진주에 파견한 패톤(M. Paton) 목사의 한자명을 따서 '배돈'이라고 병원이름을 지었다. 


호주선교회의 병원건립은 의료혜택을 통한 전도사업의 용이함을 위해서였다. 따라서 병원건립은 호주선교회가 진주에 들어온 구한말(1908년)부터 논의되었으며, 1910년 호주의 건축가 켐프가 병원설계도를 작성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당시 공사업자는 일본인 토목기술자 죽원웅차(竹元熊次)였다. 


그러나 1911년 11월 건물이 완공될 무렵 원인모를 불이 발생해 5백여파운드(당시 호주는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영국의 화폐단위를 썼다.) 이상의 손실을 보고 1913년에 가서야 겨우 완공됐다. 배돈병원은 내과, 외과, 이비인후과, 치과로 나누어져 있었고, 병상은 41대가 설비돼 있었다. 


병원에는 주로 호주인 의사가 선교사를 겸해 근무했는데 초대 원장 커렐을 비롯해 40여명의 남녀 선교사들이 병원문을 닫을 때까지 의사와 간호사 등을 맡아 봉사했다. 


이들은 병원 건립의 목적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환자 전도에 노력했는데, 각 병실에는 전도사와 전도부인을 배치해 외래환자와 입원환자들을 위해 매일 예배를 드렸다. 또한 조선인 병원직원들도 모두 병원전도협회에 가입해 '복음'전파에 힘썼다. 


당시 옥봉리 교회의 김정수 장로는 "진주에 이같은 병원이 있다는 것은 주님 사업에 얼마나 귀한 기관인지 입으로 다 말할 수 없다"고 표현했다. 


이처럼 배돈병원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환자들에게 기독교를 믿게 만드는데 주력했는데도 많은 사람들은 그것에 개의치 않고 이곳을 자주 찾아왔다. 그 이유는 배돈병원이 근대식 의료기관이라는 점과 이곳의 치료가 영리사업에 있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 서민들은 고압적인 일제의 도립병원보다 호주인의 배돈병원을 더 좋아했다. 


실례로 배돈병원은 돈 없는 빈민환자를 무료로 치료해 주는 경우가 많아 진주사회의 칭송을 자주 받아 왔는데, 1927년 12월에는 맹장염으로 죽어가는 의령군의 한 가난한 소작농을 입원시켜 무료로 수술해 주는 등 많은 의료봉사를 했다는 것이다. 


또한 배돈병원은 영어를 배우려는 학생들에게도 인기있는 장소였다. 진주농업학교 제23회 졸업생 다데이시(입석설부)는 진농에 입학했을 때 요꼬다라는 교감이 영어를 가르쳤는데 일본식 발음 때문에 제대로 영어수업을 할 수 없었는지 어느날 그는 "영어를 잘 하려면 배돈선생 집에 가서 가족들과 10분간이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다"고 배돈병원의 호주선교사로부터 원어민(原語民) 영어학습을 권유했던 기억을 회고한 적이 있다.(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기 전인 1930년대까지만 해도 중등학교에서는 영어를 배웠다.) 


그런데 40여년 동안 한결같이 진료활동을 계속해 오던 배돈병원이 아주 영영 문을 닫게 되는 일은 바로 병원을 운영하던 호주선교사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이다. 


일제는 1941년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호주선교사들을 병원에서 내쫓고 친일부역적인 조선인을 들여 앉히도록 병원에 압력을 가했다. 결국 배돈병원의 조선인 의사였던 김준기가 데이비스 원장에 이어 병원장이 됐다. 그 후 시시각각 신변의 위협을 느낀 선교사들은 병원과 교회일에서 아예 손을 떼고 모두 호주로 철수했으며, 단지 맥라렌 박사만이 선교회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진주에 남았다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체포됐다. 그는 진주경찰서 유치장에서 11주동안이나 억류됐다가 부산으로 이송된 끝에 1942년 국외로 추방됐다. 


그러나 조선인 병원장 김준기도 일제의 마음에 안들었는지 그해 12월8일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체포했다. 원장이 체포되자 배돈병원은 일제에 잘 보이기 위해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김준기의 이름으로 '익찬 동아공영(翼贊 東亞共榮)'이란 축하광고를 실었다.(그 때까지 어떤 신문에도 배돈병원이 광고를 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재판도 받지 못한채 미결수로 해방이 될 때까지 4년간 옥창에서 신음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 동안 호주선교회의 헌신적인 지원으로 운영돼 오던 병원은 금방 재정적인 위기를 맞이했고, 병원장마저 없는 병원은 곧이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일제 말부터 시작된 미공군의 남해안 공격으로 진주도 공습당해 배돈병원도 파괴를 면치 못했다.(김준기 자서전에서 증언) 


해방 후에도 배돈병원은 복귀되지 못했는데 단지 일제에 의해 징용이나 징병갔다가 돌아온 해외 귀환동포의 수용소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곳은 병들고 굶어죽는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목불인견의 생지옥이나 다름이 없었다. 당시 이곳의 참상을 목격한 한 신문기자는 그 비참한 상황을 다음과 같은 기사로 생생하게 묘사해 충격을 주었다. 


'진주 배돈병원이라면 기억있는 사람의 머리엔 붉은 벽돌집이 연상될 것이며, 외양은 현대식 건물의 호화스러운 위용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병원 옥내에 한걸음 들어놓는 사람은 그 비참한 전경에 놀람을 지나 기막힌 한숨을 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음침한 냄새나는 병실에는 가족수 최소 3명으로부터 최대 10명의 남녀노소가 아사선상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샛노란 걸레같은 피부, 굶주려 지친 몸을 처치하지 못해 마루방에 누워 있는 목숨, 그중 좀 넓은 방에는 가마니를 깔고 명색만의 안식처를 만들고 있으니 희망없는 구렁에서 낡은 목숨을 호흡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수용소에서는 11명의 아사자를 내었다고 한다.'(1946년 7월28일자 민주중보) 


이와 같이 배돈병원은 옛 명성이 온데 간데 없이 극빈자 수용시설로 전락된 끝에 얼마후 한국전쟁 때에는 미공군의 융단폭격으로 그 흔적조차 남기된 못하고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배돈병원이 한국전쟁 때 미공군의 집중폭격 목표가 된 것은 진주가 인민군의 점령하에 있을 때 이곳에 진주시 인민위원회가 설치돼 있었기 때문이다(그 안에는 진주시 여성동맹 사무실도 있었음). 원래 인민군은 미군이 교회같은 종교시설이나 병원같은 의료시설은 잘 폭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인민위원회 사무실을 배돈병원에 설치했지만, 오판이었다. 미공군은 닥치는대로 무자비한 폭격을 감행해 진주의 전 시가지를 초토화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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